괜찮아, 내일 또 뛰면 되지
야구전문기자. 직업이다. 있어 보인다. 어감도 좋다. 사람들도 그렇게 부른다. 야구판에서 잘 먹히는 소개말이다. 그게 발목을 잡았다.
“야구전문기자가 왠 빙상장?”
지난해 12월 12일 2008-2009 SBS·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스케이팅 그랑프리(GP) 파이널이 열리는 경기도 고양어울림누리 얼음마루를 찾았을 때 동료기자들이 한 말은 그랬다. 이런 세상에! 야구전문기자라고 빙상장에 오지 말란 법 있나.
“법이야 없지. ‘뭐 먹을 게 있다고 왔을까’ 궁금해서 그러지.”
거울에 심장을 비춘 듯 정직하게 말하자. 피겨를 비롯한 동계스포츠는 딱히 매력적인 종목이 아니다. 기자들 사이에선 그렇다. 그러나 야구는 겨울에 쉰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수긍하고 만다.
“놀 순 없잖아.”
이날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SP)이 예정돼 있었다. 몇 시간만 있으면 국내 피겨팬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김연아의 경기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링크 주변을 맴돌 무렵.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는 안도 미키(일본)가 눈에 띄었다.
“안녕, 안도 씨.” 기자의 인사에 안도도 반갑게 한마디.
“안녕, 누구?”
안도와 기자는 두 번 만났다. 한국에서 그리고 일본에서. 인터뷰가 목적이었다. 각각 1시간이 넘는 장시간의 인터뷰였다. 그런데 ‘누구?’라니.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믿기로 했다.
안도는 GP파이널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줄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의 우물처럼 깊은 동공에서 참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완벽한 컨디션과는 거리가 멀었다. 과거에 다쳤던 오른쪽 어깨는 여전히 말썽이었고 매혹적이었던 연기는 발목을 절뚝거리는 무희처럼 슬펐다. 무엇보다 잃어버린 점프 감각이 좀체 돌아올 줄 몰랐다.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오늘만 빙판에 있을 게 아니라면….” 기자의 덕담에 안도가 웃었다. 안도의 웃음소리. 솜으로 귀를 틀어막은 것처럼 아득하게 들리는 소리다. 그런 웃음소리를 정확히 15년 전에도 들은 것 같다. 누구였더라.
믿기지 않겠지만 기자가 처음으로 피겨를 접한 건 15년 전이었다. 소개팅에서 만난 여학생이었다.
“피겨선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또 모르지. 한국에서도 카타리나 비트 같은 피겨스케이터가 나올지.” 빙상장에서 그는 그렇게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아무나 은반 위에서 연기를 했다면 그를 근사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영국에 있는 그는 알기나 할까. 한국에 비트 같은 피겨스케이터 김연아가 출현한 걸.
“피겨 그만 둘 생각이야. 몸이 말도 못하게 불었다니까.” 더블 액셀에 실패한 뒤 그는 말했다. 순간 기분 좋게 껌을 씹다가 껌에 달라붙은 은박 포장을 이로 깨물었을 때처럼 깜짝 놀랐다. 대회가 코앞이었다. 그러나 체육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한 그에게 피겨는 수학의 정석이나 성문종합영어와 같았다. 대학 입학과 함께 임무가 끝난 셈이었다. 되레 늦은 결정이었다.
“대회? 실력이 특출 난 것도 아닌데 뭘.”
고교 때까지는 유망주 소리도 들었다. 그 뒤는. 다시 더블 액셀에 실패.
“김연아가 큰 실수만 하지 않고 기본만 한다면 아사다 마오가 트리플 액셀 할아버지를 뛴대도 (김연아를)이길 순 없을 것이다.” 대한빙상경기연맹 고위 관계자는 여자 싱글 피리스케이팅(FS)이 시작하기 전 목소리를 높였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2년 전 “김연아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아사다 마오가 트리플 액셀 한 번 뛰면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던 이였다.
김연아는 전날 SP에서 65.94점을 받아 1위에 올랐다. 2위인 아사다는 65.38점을 받아 김연아에 0.56점차 뒤진 2위였다. 아사다가 점수를 만회하기 위해 FS에서 트리플 액셀을 2번 시도할 것이란 소식이 들렸다. 과연 아사다의 승부수에 맞서 김연아는 기본에 충실할 것인가.
김연아와 아사다에 앞서 안도가 링크에 등장했다. 쇼트프로그램 첫번째 점프에서 크게 넘어지는 등 실수를 연발했던 안도는 FS에서 쿼드러플(4회전) 점프로 이를 한꺼번에 만회할 참이었다.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안도가 점프 뒤 착빙 실패로 빙판에 넘어졌다. 다행히 부상은 없었지만 확실히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이윽고 김연아가 등장했다. 앞서 아사다는 트리플 액셀을 2회 성공하고 다른 기술에서도 무난한 연기를 펼치며 총점 188.55점으로 경기를 마친 상태였다.
‘큰 실수 조심하고 기본만….’ 이번에도 뭔가를 옹알거리고 말았다. 초반은 좋았다. 트리플 룹과 트리플 러츠-더블(2회전)토룹-더블 룹 3연속 점프 콤비네이션을 완벽하게 해냈다. 전날 SP에서 실수한 더블 액셀-트리플 토룹 점프도 보기 좋게 성공했다. 김연아의 우승이 확정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러나 트리플 러츠에 이어 트리플 살코에서 예상 밖의 실수를 범하며 경기를 원점으로 돌렸다. 그 가운데 트리플 살코의 실패가 뼈아팠다. 김연아가 다른 점프도 아니고 트리플 살코에서 실패한 적이 있었던가.
“교원자격증 따서 체육교사가 될 생각이야. 근사하지 않아?” 그는 그렇게 말한 뒤 다시 점프를 시도하려 크게 원을 돌았다. 어디 근사하다 뿐인가. 당시 기자에겐 그의 숨이 산소였고 그의 언어가 성경이었다. 마지막 더블 액셀 역시 실패.
안도는 결국 6명의 선수 가운데 최하위에 머물렀다. 김연아도 아사다에 이어 2위가 됐다. 시상식을 앞두고 선수 대기실을 지나쳤다. 안도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복도 의자에 앉았다. 2007시즌 세계선수권대회 챔피언. 그러나 예전 같지 않은 안도.
마지막 더블 액셀에 실패했을 때 기자는 그에게 그 말을 하지 않았어야 옳았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그깟 대회 아무려면 어때”라고. 왜 그땐 몰랐을까. 어째서 기자의 말에 그가 고개를 숙였는지. 그리고 스케이트를 쥔 한쪽 손이 심하게 떨렸는지.
이번엔 안도가 기자를 보고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상냥한 안도의 인사. 기자는 15년 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괜찮아. 내일 또 뛰면 되지.”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굳이 믿는다고 떠들지 않아도 좋다. 대개는 그냥 믿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걸 서른일곱 살에 알았다.
김연아의 점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점프는 미래의 도약'이라는 것이다. 지금 점프에 실패해도 내일은 내일의 점프가 있고, 점프의 속성은 어차피 도약인 것이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지금 현실이란 빙판에 넘어져도 우리는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희망'이란 이름의 점프를 시도할 것이다. 누구처럼? 김연아처럼!
[출처] 박동희 기자의 <스포츠 춘추> 블로그